어찌하오리까 주의 재림이 임박한데
정말 종말이 다 되었나? <아주 귀한 메시지입니다.끝까지 읽으시면 큰 은혜를 받게되실것입니다.^.~마라나타 손양원목사님의 '주님고대가'를 함께 올립니다.읽기에 집중이 되시지 않으시면 정지버튼 꾸욱~>
예수님은 2,30대의 젊은이들로 제자를 삼으셨다. 그것은 신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원래 순수함이 있었고 신앙의 열정이 있었다. 젊기 때문에 순수한 열정으로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면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거룩한 사업을 위하여 몸을 바쳤다. 그들은 젊었지만 세상의 쾌락과 모든 야망을 던져버리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걸었다. 그들의 기대는 결코 헛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든 소경이든 무슨 병이라도 다 고칠수 있었고 귀신을 쫓아내며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런 기적들을 체험할 때마다 자기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 참 잘했다고 생각되었다. 예수님은 어부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실 수 있고 바다의 풍랑을 멈추게도 하시며 물위로 걸어다닐 수도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 그런 예수님을 따르면서 제자들은 결코 장래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예수님께서는 힘한번 써보지 못하고 군병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시고 말았다.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수난은 여러번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일이었지만 너무 많은 능력과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막연하게 생각되었을 뿐 그런 말씀을 들을 때는 현실성이 없어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로 이루어졌고 제자들은 엄청난 충격과 실망으로 타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충격은 이상하게 제자들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힘을 낼 수가 없었다. 분주하던 전도사업은 중단되어 다음에 방문 할 예정지를 알아보는 일도, 재정을 계산해 보는 일도, 몰려든 군중들을 질서있게 인도하는 일도 모두 필요없게 되었다. 예수님은 아무런 사후 대책 없이 남긴 유산도 없이 허망하게 알거지 제자들을 남겨둔채 떠나 버리셨다. 다만 약속이 있었다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것과 하늘로 올라가실 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실 성령님을 대망하면서 기도에 전념하였다. 약속대로 성령님은 오셨다. 성령님의 오심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불같이 뜨겁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맥이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위대한 힘을 쏟아 부어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면서 막강한 능력을 행하실 때 보다 더 큰 믿음과 용기가 북받쳤다. 군병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놀라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그들이지만, 작은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손사례 쳤던 힘도 용기도 없는 그들이었지만 성령께서 오셨을 때는 그들은 강하고 능력있는 용사들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내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과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라”고 외쳤다. 이빨을 드러낸 사자앞에서도 평정을 잃치 않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옥에 갇혀서도 복음을 증거하면서 나의 몸은 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어떠한 권세나 영화라도 그들을 억누르고 묶어 놓을 수 없었다. 성령께서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리라고 하셨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확인시켜 주셨다. 그런데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증거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증거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이야말로 제자들의 원동력이었고, 그들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주는 놀라운 힘이었다. 제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외쳤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외칠 때 마다 그들의 가슴은 불이 붙었고 폭발하는 힘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사도들이 세우는 교회는 어디서나 똑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교회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신앙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재림이 없다면 성경은 모두 헛된 고문서가 되고,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며, 예수님은 12제자를 비롯하여 예수님께 일생을 걸었던 많은 추종자들을 등쳐먹은 사기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의 수난, 부활, 승천, 모두 중요하지만 재림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재림에 의해서만 그런 모든 사실들이 완성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의 구속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지 않았다. 아직도 세상에는 죄악이 물결치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고통과 사망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다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새하늘과 새땅이 완성되어야 비로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완결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은 456회인데 반하여 재림에 대한 예언은 1200회이상 신약에서도 300회 이상 재림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교회는 진정으로 재림을 대망할 때 교회일 수 있다. 재림 대망을 잃어버린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냥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일 뿐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이 땅에서의 삶은 잠간이고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추구하고 어디에 목숨을 거는가?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벧후3:3-4)고 하신 말씀은 이시대를 향한 예언이었다. 실제로 예수님의 재림을 반대하던지 예수님의 재림을 허구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의 영이 심령속에 오시므로 그것이 바로 재림이라고 한다. 또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 예수님은 영으로 재림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수를 많이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의 실수를 들추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고 결국 교회와 사회에 혼란을 가져온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의 실수나 부족함이 예수님의 재림을 허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재림 대망신앙이 희석되고 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지금 이시대를 마지막 때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마지막 때에 대한 인식을 불식시키고 이 땅에서 편안하고 걱정없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재림대망신앙이 사라지게 된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 1) 마지막 때라고 한다면 삶의 목표가 흔들린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계획하고 노력해서 쌓아올리고 더 좋은 장래를 기대하던 생활과 인생의 기조가 완전히 뒤집혀야 하기 때문이다. 재림대망신앙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예수님께서 빨리 오셔서 죄악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나라를 건설하여 주님과 영원히 살기를 소망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재림대망신앙은 이땅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신앙이 되고 말았다.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이 세상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2) 마귀의 궤계는 말세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말세를 외치면서 예수님재림이 임박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열심있는 성도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은 파급효과가 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각심을 줘 영적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마귀는 재림대망신앙을 매우 싫어할 수 밖에 없었다. 재림 대망신앙이 뜨꺼워지기만 하면 마귀가 좋아하는 육신의 일들을 모두 멀리하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생활로 돌이켜 버리니 마귀의 분노와 심술이 극에 달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말세를 외치고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몇 몇 성도들이나 교계 지도자들을 넘어뜨리는데 성공 했다. 이단이 되기도 하고 재림의 때와 장소등을 계시로 알게 되었다고 발표해서 교계와 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교계에서 말세를 외치는 신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게 되고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었다. 결국 강단에서 재림대망에 대한 설교가 없어지고 여기에 대한 연구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마귀의 확실한 승리이다. 가장 중요한 신앙에 대하여 함구하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3) 종말을 말하기에는 너무 살기 좋은 세상이다 세상에 먹고 입을 것이 너무 많고 모든 것이 불편이 없도록 발달 되었기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전쟁이나 질병, 기근같은 어려움에 쫒길 때는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애착이 적어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북한의 그리스도인이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랍계 국가나 중국같은 공산국가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지금도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에서 큰 고통없이 살아가는 성도들은 철야하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이유가 없다. 기도원을 찾아가거나 생활현장에서라도 작정기도를 한다던지 절실하게 매달려야 할 어려움들이 없다. 위험과 고통이 닥쳐와야 비로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으나 실제로 2000년이 지나도 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장 3절) 라고 하셨고 예루살렘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도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증언 하셨다. 그후 예수님이 승천 하실때 천사들이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고 말했다. 이처럼 당장이라도 오실것 처럼 말씀하시면서 당시의 제자들에게도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라라고 하셨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제자들이 하나 둘 순교 당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에 있어서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다시 오신다는 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외쳤다.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서 히브리서 어디서든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으라고 계속 권면 한다. 결국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60년도 넘었는데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순교하였고 사도 요한만 남았는데 그때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총체적인 계획서 요한 계시록을 주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늦게 오실 것이었다면 차라리 약2000년쯤 뒤에 올 것이라고 귀뜸을 해주셨다면 지금까지만이라도 마음 푹놓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얼마나 심통이 커서 2000년 동안이나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놓지못하고 살도록 하셨는가? 그럼 그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 옥에 갇히고 재산을 몰수 당하고 가족과 헤어져 방랑자가 되기도 하고 결국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서 보상을 받고 어디에 가서 그들의 인생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대답은 너무 간단하다. 하늘에 가서 예수님께 보상 받아야지 이세상 어디에 가서 어느 누구에게 보상 받겠는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2)고 하셨고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1-12)고 하셨다. 결론은 그것이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던 그것은 예수님 사정이고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 오시기만 목빠지게 기다리면서 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 기다리는 마음을 빼앗기면 바로 세상에 눈을 돌리고 육신 생활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외국에 출장간 남편을 빨리 오지 않는다고 기다리지 말까? 오기전까지는 이웃집 남자하고 바람이나 피울까? 초대교회 당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 땅에서 사람 사는 것처럼 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날에는 기독교인이 세상사람들보다 더 잘 살고 더 성공하고 더 위에서 군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땅에서는 나그네라고 하셨다. 이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다.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말고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천국을 바라보면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위하여 의를 추구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나라를 애타게 사모하는가? 불의로 가득찬 음란하고 악한 세대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오기를 눈물로 기도하는가? 더러운 세상에 합류되지 않고 주님의 의와 거룩함에 참여하고자 몸부림 치고 있는가? 아무래도 그런 몸부림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부흥회를 하면 대개 울며 불며 죄를 회개하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자신이 잘못 살아왔음에 대하여 원통해하고 돌이켰다. 성경의 역사에서도 언제나 영적부흥은 재를 뒤집어 쓰고 눈물로 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흥회를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배꼽을 잡고 웃다가 세상의 육적인 욕심으로 가득채운채 끝이난다. 긍정의 힘으로 내 인생을 다시 개척하자. 믿음으로 사업에 열중하여 무지막지하게 벌어보자. 개그맨을 능가하는 목사가 아무래도 훌륭하다. 재미없는 설교는 듣기 싫다. 오늘날 얼마나 구미에 딱 맞는 설교가 많은데 그런 설교 때문에 시간낭비 할 수 있나?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다. 전에는 부흥회를 하면 “주님고대가” 가 대표적인 곡이었다. “낯에나 밤에나 눈물머금고 내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라고 찬송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요즘은 무슨 락밴드를 불러놓은 광경이다. 마이클 잭슨이라도 불러온 것같다. 복잡한 세상에서 많이 시달렸으니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예배에서 어떻게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참회를 할 수가 있을까?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할 때 신랑 맞을 준비를 위해서 내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재림대망신앙으로 마지막때를 준비해야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했다. 예수님도 그렇게 비유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랑하는 신부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아낌없이 당신의 몸을 주셨다. 신랑신부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요즘 사람들의 결혼이야 여러가지 조건이 앞서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아무런 조건없는 사랑의 관계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신앙에는 다른 어떤 이유가 앞서서도 아니된다. 신부가 신랑을 사모하는 순수한 사랑만이 이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신랑되신 예수께서 오신다고 하니까 제발 오시지 말라고 재림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궐기를 하고 있다. 오늘날 바람난 교회들이 세상과 짝이 되어 바람 피우기에 바빠서 예수님께서 안부를 묻고 예수님이 전화하면 전화를 확 꺼버린다. 요즘 교회는 무슨 할일이 그렇게 많은지 목사들은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교인들은 날마다 몰려 다니면서 구역예배, 바자회, 무슨 경연 대회등으로 정신없다. 그러면서 그것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번에 여동생에게 “구역예배를 뭐하러 모이냐”고 질문을 하니까 여동생 왈 “구역예배 헌금이 주일 예배 헌금보다 더 많이 나와요”라고 명답을 해주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종교행사들 때문에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이사야1:11-15절 말씀이 기억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어떤 일이든지 다른 목적이나 동기가 개입 되어서는 아니된다. 사회봉사도 불우이웃 돕기도 전도를 위한 문화 행사도 세계선교도 성도간의 친교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일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전도를 위해 열린 예배를 드린다고 유명가수를 불러서 예배를 유명가수 공연장으로 만들어 놓고 모든 영광을 출연한 가수와 예배를 기획하고 예배에 출연한 여러 스탭진들에게 다 돌리고 그 예배의 시종에 예수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시대에 옛 성인들의 삶과 기도를 상기하며 참 신앙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분도 요셉 라브르는 거지 성자로 유명한 분이다. 그는 1748년 3월26일, 프랑스 아메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의 18세기 전유럽 상류 사회는 신앙심을 잃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던 시대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라브르 같은 거지 성인을 일으켜 그 시대를 반성케 하였다. 라브르는 수도사가 되려고 수도원에 들어가고자 일곱 번이나 애썼지만, 거절당하고 할 수 없이 자기 혼자서 거지 순례자로 나섰다. 세상과 모든 쾌락을 버리고 거칠고 긴 수도복을 입고 다리의 반은 살을 드러낸 채 노끈을 허리에 묶고, 가슴에는 십자가를 걸고, 자루 하나를 얻어 그 속에 성경책, 준주성범책, 성무일과, 바늘, 실, 빵 등을 넣고 지팡이 끝에 걸어 어깨에 메고 다녔다. 때로는 일부러 무겁게 하려고 자루 속에 돌을 넣고 다니기도 했다. 이 모양으로 걸어가면서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였다. 그의 기도는 “오소서, 내 주여! 오소서. 나 당신을 고대고대 하나이다. 나 당신만 탐합니다. 당신 기다리는 잠시가 내게는 천 년과 같습니다” 하였다. 13년 동안, 프랑스, 스페인,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를 3만 킬로미터나 도보로 순례했다. 한 번 떠난 후 고향엔 다시 돌아가지도 않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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