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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73강. 어떤 눈을 가지셨나요?

by IMmiji 2010. 4. 28.

73강. 어떤 눈을 가지셨나요? (요 12:1-11)

 

요 12:1-1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성경을 열면 창세기 1장 1절이 나오지요.

창세기 1장 1절이 뭐라고 하는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천지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지요.

천지란? 만물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도 천지 속에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럼 천지가 생기기 전에는 누가 있었나요?

하나님이 계셨지요.

하나님은 천지의 유무와 상관없이 계신 분이지요.

 

하나님은 천지 바깥에 계신 분이에요.

왜냐하면! 천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하나님은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천지가 없어도 계시는 분이지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은 천지가 있기 전에 계셨으니까요.

천지가 없어도 하나님이 계시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겠지요.

 

지금 제가 말장난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있고 하나님이 있다고 믿고 살아요.

내 존재함이 먼저에요.

그런데 성경을 열면 내 존재보다 하나님 존재가 더 우선이에요.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천지가 없어도 계시는데 전혀 문제가 없고 지장이 없이 존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무엇하려고 천지를 만들었을까요?

 

뭔가 이유가 있어서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심심해서 만든 것을 아닐 것 아니에요.

뭔가 목적이 있어서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그 목적을 알아야 우리의 존재 목적도 알게 되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전 성경을 보면서 이런 고민을 하였어요.

하나님이 왜? 나(천지)를 만들었을까?

 

천지 속엔 나도 포함이 되어있어요.

그런 나를 하나님이 왜? 만들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되겠지요.

하나님이 뭔가 필요해서 만들었겠지요.

 

그래서 전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존재하심부터 풀어가고자 하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부산물이에요.

왜냐하면! 난 원래 없던 자였는데 하나님(예수님)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천지)는 예수님을 위한 소모품이지요.

소모품이란 주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는 내가 내 주인이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늘 물어야 해요.

하나님 난 누구입니까?

그럼 하나님은 예수를 위한 소모품이라고 알려주세요.

넌 원래 없던 자 이였는데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알려 주세요.

이걸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전 하나님에게 물어요.

하나님 왜? 저를 만들었습니까?

왜? 늙으신 부모 아래서 날 태어나게 하셨나요?

 

그럼 하나님이 예수를 위해서 만들었다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위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럼 전 또 묻지요.

창세전 언약이 뭔데요?

응~

내 아들을 주(主)가 되게 하는 거야!

주(主)가 뭔데요?

응~ 주인(主人)!

만물의 주인 시키려고 만물을 만들었어!

 

그럼 나는 예수님 꼬붕이네요?

그래!

넌 예수 꼬붕이야!

모든 만물이 예수님 장난감이야!

그럼 나도 예수님 장난감입니까?

그럼 너도 예수님 장난감이지!

 

이렇게 되면 “나” 라는 존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살아가는 존재임이 밝혀지는 겁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드러나요.

이런 사실이 믿어질 때 사도바울처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무지하게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럼에도 우린 덤덤해요.

이런 말을 들으면 할렐루야가 나와야 합니다.

 

야~ 내 인생 별거 아니구나!

그냥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시는구나!

내가 발버둥 친다고 해서 창조의 목적이 달라지지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깃털처럼 가벼워져요.

그럼에도 우리 인생은 깃털처럼 가볍기는커녕 쇠붙이 같이 무거워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린 우리를 위하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게 내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심각하고 심란한 겁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죄 때문이에요.

죄가 우리 인생사를 무겁게 만들어 놓았어요.

눈만 뜨면 어떻게 살지!

고민에 휩싸이는 겁니다.

 

우린 우리의 존재함이 우선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존재하심이 우선이에요.

왜냐하면! 우린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아주 간단하게 말을 했지만 이게 성경의 중심 사상이에요.

성경은 이걸 이렇게 뚜껍게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수용을 안 하니 긴긴 역사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물을 겁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삽니까?

아니요.

저도 그렇게 못살아요.

깃털처럼 가볍게 살지 못해요.

저도 눈만 뜨면 날 위해 살려고 하지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지 않아요.

 

예수를 믿어도 인생살이가 그리 간단치 않아요.

왜냐하면! 죄(罪)가 나를 주체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에요.

죄는 끊임없이 주체를 부활을 시켜요.

 

죄(罪) 라는 놈이 나를 소모품으로 살지 말고 주체로 살라고 부활을 시켜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데 몸뚱이는 여전히 헌 피조물 그대로에요.

육신이라는 놈이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데 자기중심으로 살라고 해요.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중심으로 움직여요.

그러니 내가 산다는 것 바탕엔 항상 죄가 풀풀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성도는 영적으로는 새로운 피조물인데 육적으로는 헌 몸이에요.

성도는 이 두 사이에 끼여 있어요.

그러니 힘이 든 겁니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하고, 겉 사람은 자기 법을 쫓으라고 해요.

 

그래서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을 하는 겁니다.

탄식은 단회성이 아니고 계속하여 현재 진행형이에요.

지금도 바울이 탄식한 탄식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와요.

 

죄 때문에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중풍병자로 말하는 겁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 중풍병자에요.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겉 사람은 육신의 법을 좋아해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중심주제가 되어서 전개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포카스가 맞추어져 있어요.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어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는 것은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늘에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 하늘 이야기를 담아 놓은 겁니다.

 

하나님은 육의 이야기 속에 영에 의미를 담아 놓았어요.

하지만 영의 이야기는 성령을 받은 성도만이 깨달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아요.

왜냐하면! 성경은 모두가 예수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 형제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 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해요.

 

예수님의 친 형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라보았다는 말은 혈육은 하나님의 일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엔 인간의 조건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육에겐 영은 비밀이에요.

육은 영의 일을 감지하지 못해요.

이는 육과 영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에요.

 

고전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보세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알아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복음은 감출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에 일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놓았어요.

영의 일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 받는다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 받는 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지면 배짱 편하게 담대하게 사세요.

예수님이 믿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 안에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믿을 수가 있는 분이 아니에요.

인간은 믿고 싶어도 못 믿어요.

아니 안 믿어져요.

 

예수님은 이런 바탕 위에서 오셨어요.

인간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아무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보여요.

예수님이 메시야 라는 것이 믿어져요.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세요.

이러면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람이 나옵니다.

“마리아”와 “가룟 유다”에요.

 

마리아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다르게 보았어요.

마리아는 영(靈)으로 보았고 가룟 유다는 육(肉)으로 보았어요.

영(靈)으로 보았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보았고, 육(肉)으로 보았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하는 것이 다른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영적(靈的) 안목(眼目)으로 대하는데 가룟 유다는 육적(肉的) 안목(眼目)으로 대하였어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영적 가치로 대하는데 가룟 유다는 육적 가치로 대했어요.

 

참 재미있는 것은 가룟 유다는 12 제자 중에 한 사람이고 마리아는 그저 그런 죄인 중에 한 사람이에요.

요즘말로 마리아는 평신도이고 가룟 유다는 목사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도 가룟 유다가 마리아 보단 더 많이 알고 잘 알아야 해요.

그런데 제자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육으로 보고 있고, 평신도는 영으로 보고 있어요.

 

요즘 말로 목사는 십자가를 모르는데 성도는 십자가를 아는 것과 같아요.

목사는 육적으로 성경을 해석 하는데 평신도는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요.

무섭기도 하지요.

 

복음을 아는 데에는 목사나 평신도나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이는 복음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이냐 육이냐의 차이에요.

 

내가 영에 속하였느냐 육에 속하였느냐의 차이에요.

한 솥 밥을 먹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영이 다르면 동상이몽(同床異夢) 일 수밖에 없어요.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것을 보고도 다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어도 그래요.

각 사람마다 달리 해석을 해요.

육에 속한 사람은 육으로 해석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으로 해석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복(福)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다고 합시다.

하늘에 복과 땅에 복이 달라요.

당연히 육에 속한 사람은 땅에 복을 상상 할 것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복을 상상 할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땅에서 잘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할 것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서 잘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영이냐 육이냐에 따라서 사람마다 말씀을 해석하는 틀이 있어요.

각자의 틀로서 판단을 하니 각양 다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틀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오면 부서져요.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선 인간의 틀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를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은 선악의 구조로 형성이 되었어요.

지혜 역시 그래요.

이성이나 지혜나 모두가 죄로 인하여 틀린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해석을 내어 놓아도 십자가 안에선 원수가 되어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 성경을 해석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자신들의 성경 해석에 틀로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인간들이 해 오던 틀로서 예수님을 맞추어 보니 이단인 겁니다.

 

그래서 죽인 겁니다.

이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했어요.

건축자란? 율법주의자들을 말해요.

 

율법주의자들은 모든 성경을 인간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께선 인간의 행함을 안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율법으로 의로워지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새끼라고 하면서 지옥에 가라고 저주를 해 버립니다.

 

아니 전통적으로 성경을 해석한 바리새인들을 독사새끼라고 한다면 유대인전체가 마귀 후손이란 말이에요.

이걸 누가 용납하겠어요.

그러니 참람죄로 십자가에 죽인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면 이런 일을 똑 같이 발생을 시켜요.

기존에 성경 해석의 틀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겁니다.

기존에 신학이 틀렸다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존의 전통 신학으로 이단으로 매도당하여 죽임을 당하였듯이 지금도 기존의 전통 교리에 의하여 십자가 복음은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죽임 당하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 하면 기존의 신학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였어요.

물론 바울이나 12제자들도 동일했어요.

스데반이나 바울은 구약 성경을 전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을 했어요.

 

십자가로 해석하니 구약의 날과 달과 절기와 같은 율법에 속한 것들을 폐하는 것으로 설교가 되어지는 겁니다.

십자가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니 자연히 십자가 안에서 율법적 신앙은 사라지잖아요.

율법을 친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을 거부한단 말입니다.

 

인간의 행함 속엔 의(義)가 없다고 하니 발끈 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엔 의(義)가 없다고 하는데 누가 율법을 지키겠습니까?

알다시피 율법은 인간의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잖아요.

 

율법 속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 들어가 있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 들어가 있고!

제물을 갖다 바치는 제사가 들어가 있어요.

 

이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 하셨다고 하니 제사장들과 같이 성전에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하고 말잖어요.

그러니 누구 이걸 용납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단이라고 매도하여 죽인 겁니다.

 

복음을 누가 싫어하느냐?

목사들이에요.

물론 육에 속한 사람은 다 싫어해요.

하지만 목사들이 더 싫어해요.

왜냐하면! 복음이 목사들이 설 자리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똑 같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면 인간의 행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성화를 주장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난리를 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 누가 교회에 나오고 십일조를 하며 주일을 지키겠느냐 에요.

 

그래도 인간들이 뭔가 하여야 할 것을 남겨 두어야 교회가 유지 될 것 아니냐 란 말입니다.

결국 유대인들과 같이 인간의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율법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본인들은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하여도 그 열매가 율법주의로 나타나고 있잖아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 하셨습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義)가 되므로 예수님의 피만 믿읍시다!

예수님만 자랑합시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하셨지만!

구원 받은 성도로서 새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하게 성화 하여야 합니다! 라고 하고 있어요.

 

이런 설교를 들으면 인간의 행함을 포기 할 수가 없어요.

결국 율법 신앙으로 회귀하는 겁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이런 신앙이 득세 했어요.

 

그래서 바울이 너희 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열심과 충성을 섞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단호하게 말한 겁니다.

왜? 천하고 약한 초등학문으로 다시 돌아가 사람의 종이 되고자 하느냐 라고 질타했어요.

 

이 시대 성화주의는 천하고 약한 초등학문이에요.

교인들이 목사의 꼬붕이 되어서 꼭두각시놀음을 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들이 제사장 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무슨 중보자라도 되는 냥 거드름을 피우고 있어요.

자신의 말이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되는 냥 교인들에게 순종하라고 강요하고 있어요.

 

육에 속한 사람은 이들의 말에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 있어요.

육은 힘에 지시를 받기 때문입니다.

육은 반드시 힘에 따라서 우열이 있고 차별이 생겨요.

성화를 많이 한 목사는 높고 덜한 교인은 낮아요.

 

목사는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이 직업인데 어찌 세상에서 돈 벌다가 주일이면 교회에 근근히 오는 교인들이 따라가겠어요.

성화는 교인들이 목사를 못 따라가요.

그러니 성화주의 안에선 교인은 목사의 영원한 하수(下手)가 되는 겁니다.

성화주의 안에선 성화는 힘이에요.

 

그러나 십자가 안은 인간의 의(義)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힘이 없어요.

힘이 없으니 우열도 없고 차별도 없는 겁니다.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인데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너도 예수 피로 구원 받고 나도 예수 피로 구원받았는데 무슨 우열이 있어요.

없어요.

 

십자가 안에는 잘난 놈 못난 놈이 없어요.

다 예수님 피로 용서받은 죄인들뿐이에요.

예수님 피로 용서 받은 자들만 있으니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해석을 하지요.

 

십자가 안에는 하나의 해석 밖에 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피 뿐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해석하는 것 밖에 없어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잖아요.

그런데 성령은 한 성령이에요.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한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이 십자가 영(靈)이세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 이야기만을 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성령은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에서 해석을 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하나 같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들을 합니다.

이는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라고 보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목소리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겁니다.

 

자 이걸 오늘 본문에 적용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과 가룟 유다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내용은 4 복음서 모두가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향유를 부은 사건은 복음서 마다 조금 다르게 기술을 하고 있어요.

이는 각 복음서마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향유 사건은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서

마태복음 26:6-13절과,

마가복음 14:3-9절과,

누가복음 7:36-50절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조금씩 달라요.

어떤 분들은 조금씩 다르게 기술 되어 있으니 같은 사람이다! 아니다! 라고도 논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사건의 본질이 아니므로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같은 사람이라고 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고 하든!

누가 부었느냐가 중요치 않고 그 의미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니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 중심으로 해석을 합니다.

 

성경을 해석 할 때 자구(字句)에 매달리다 보면 본질을 놓치기 쉬워요.

큰 틀에서 지금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핵심을 아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지 않고 단어 하나 하나에 매달려서 해석을 하고자 하면 전체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니 향유 사건도 누가 했느냐!

같은 사건이냐!

아니냐! 를 따지지 말고 도대체 이 사건이 예수님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 복음에선 바리새인의 집에서 행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선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행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마태 마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말하면서 비슷한데,

누가 복음에선 탕감 받은 죄사함의 문제로 풀이를 하고 있어요.

 

저는 심정적으로는 한 사람이라고 보고 싶어요.

한 가지 사건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깨닫는 것은 영과 육에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빛이라 하고 세상은 어둠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둠은 빛이 하는 일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 흐름이 영과 육의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존에 해석을 전부 어둠이고 육이라고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해석하는 것만 영이고 빛이라는 겁니다.

아주 독선적이지요.

 

그러니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사건을 가지고도 육과 영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도 예수님(마리아)과 가룟 유다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문제는 잠시 후에 살펴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라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말은 너희는 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보느냐!

영적으로 해석하느냐!

육으로 보느냐!

영으로 보느냐! 를 묻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의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마다 자기 신학이 있어요.

신학교를 졸업해야 신학이 있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가 신학에요.

 

난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다! 난 저렇게 생각한다!

이게 신학이에요.

 

어린아이가 아는 하나님이 다르고!

청년이 아는 하나님이 다르고!

사업하는 사장님이 아는 하나님이 다르고!

종업원이 아는 하나님이 달라요.

모두가 자기 유익으로 하나님을 이해해요.

 

각자가 자기 유익된 관점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해석하게 되어 있어요.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도 그 사람의 내재된 지식과 사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곤 그 해석된 것을 바탕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는 안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어요.

 

영으로 보느냐!

육으로 보느냐!

법으로 보느냐!

은혜로 보느냐!

 

법에 사람은 법으로 이해할 것이고, 은혜의 사람은 은혜로 이해할 것입니다.

선악에 사람은 선악적 구조로 풀이 할 것이고, 생명에 사람은 생명의 문제로 풀이 할 것입니다.

이처럼 동일한 한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가지고도 법에 속하였는지! 은혜에 속하였는지! 서로의 본질을 가려 낼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동일한 의미에요.

 

이 물음은 곧 이 시대 우리에게 묻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에 따라서 전혀 다른 신앙을 낳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메시야로 보느냐!

아니면 선생으로 보느냐!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느냐!

아니면 부처나 공자나 마호메트와 같은 성자의 한 사람으로 보느냐!

예수님을 성자로 보면 그의 가르침을 배우면 되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면 가르침을 배워서는 안 되고 그를 믿어야 해요.

 

예수를 선생으로 보면 죽고 사는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없어요.

본받고 닮고자 하면 되어요.

그러나 예수를 메시야로 보면 죽고 사는 문제로 대두가 되어요.

구주로 믿느냐! 안 믿느냐! 로 나타나요.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가룟 유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선생으로 본 사람과 메시야로 본 사람간의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을 가지고도 달리 이해를 하는 겁니다.

 

한 사람은 물질적 가치 기준으로 향유를 판단하였고!

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예수님의 죽으심에 두었어요.

굉장히 중요한 공부니 잘 새겨들으세요.

 

오늘 본문을 보면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과 가룟 유다가 다투고 있지요.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과 가룟 유다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는 반면에 가룟 유다는 어리석다고 하지요.

 

예수님과 마리아의 생각이 같아요.

생각이 같다는 것은 동질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이 곧 마리아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해석은 곧 마리아의 해석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결국 마리아의 해석과 가룟 유다의 해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해되지요.

 

자 봅시다.

본문을 보면 서로의 해석이 다르지요.

예수님(마리아)은 향유 사건을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가룟 유다는 허비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요.

 

준비는 꼭 필요한 것을 말하지만 허비는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가치가 완전히 달라요.

그러니 마리아와 가룟 유다는 육과 영의 가치에 차이에서 나온 해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곧 마리아(예수님)의 안목과 가룟 유다의 안목의 차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린 베다니 라는 그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선 누구 집이라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 할 수 있어요.

 

유추컨대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였다고 한다면 아마도 예수님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인 것만큼은 틀림이 없겠지요.

예수님과 교분이 있으니 초청을 하고 잔치를 베풀지요.

 

다른 복음서를 인용하여서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시몬이라는 사람이 문둥병으로 시달리다가 예수님에 의하여 고침을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문둥병자였던 시몬의 집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시몬이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감사하여서 초청을 한 거겠지요.

 

그런데 그 동네에 나사로가 살고 있었어요.

아마도 베다니 라는 동네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모양입니다.

암튼 나사로의 누이 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초대를 받고 갑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장롱 속에 보관해 두었던 향유가 가득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겨 드립니다.

그러자 향유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차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어요.

인간의 속성상 누가 튀는 일을 하면 뒷 담화를 까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 낄끼리 수군 수군 하였을 겁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가 일갈을 한 것이라 유추 할 수가 있어요.

 

향유란? 그 당시 여인들이 시집 갈 준비물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인들은 몸을 단장하게 하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것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기 몸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도록 바르기 위하여 돈만 생기면 향유를 모으고 또 모았어요.

지금처럼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대가 아니고 재래식으로 추출하는 시대라 향유가 귀했어요.

 

향유란 당시 최고의 가치로 여겼어요.

아마도 샤넬 5 정도 되었나 보아요.

그만큼 귀하다 보니 구하기가 힘이 드니 틈만 나면 사 모았어요.

그렇게 모은 것이 300 데나리온 값어치 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를 보면 하루 삯을 한 데나리온에 정하고 일을 시킨 것을 보아서 당시 장정 한 사람의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었어요.

요즘 식으로 환산하면 장정 하루 일당이 7만원으로 잡으면 300 데나리온이라고 했으니 2100만원이나 되는 값어치입니다.

 

이는 여자의 품삯으로 계산하면 남자의 삼분의 일 수준이니 하루 일당 2만원씩을 받아서 2100만원어치의 향유를 사 모아서 두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시집갈 밑천 전부를 투자 했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모으고 값지고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어요.

한 순간에 다 쏟아 부어 버린 겁니다.

2100만원을 한 순간에 땅에 쏟아 버린 셈입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가 돈으로 환산하여서 난리를 치는 겁니다.

야~ 이 미친 여자야!

그게 값이 얼마인데 그걸 발에 붓느냐!

네가 제정신이야!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얼마나 많이 도울 수가 있는데!

그래 그걸 발 씻는데 허비하고 있느냐!

이 등신아!

가룟 유다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심정적으로 가룟 유다를 동정했어요.

상식적으로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에요.

 

암튼 마리아는 가룟 유다의 힐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 발을 닦습니다.

발에 입을 맞추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에요.

가히 제 정신이라고 볼 수가 없겠지요.

 

여자의 긴 머리털은 여자의 영광을 상징해요.

반대로 짧은 머리는 여자의 수치에요.

그래서 여자는 머리를 기르고 귀하게 손질을 하였어요.

 

그런데 마리아가 그 귀한 머리털로 예수님 발을 닦고 있는 겁니다.

이는 자기 영광은 예수님 발만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내 가치가 예수님 발만도 못하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속된 말로 난 예수님의 발가락에 때만도 못한 인간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평생 모아온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은 것은 내 인생의 전부를 다 예수님에게 드린다는 의미에요.

나의 영광은 당신의 발등상의 때와 같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많으면 이렇게 하겠어요.

 

이걸 누가복음에선 죄사함 받은 것으로 비유했어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고 했거든요.

그러니 마리아는 자신이 죄사함 받은 것이 향유보다 귀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을 영적으로 대접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런 행동을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자기 인생을 몽땅 드린 것이 되는 겁니다.

자신도 예수님의 죽으심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일이에요.

 

야~ 흥분이 되어서 가슴이 또 벌렁거리고 뛰네요.

여러분들도 같은 기분이라야 하는데!

주여~ 한 마음이 되게 하소서!

잠시 호흡 좀 고르고 합시다.

휴~우

 

오늘 본문을 말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하지요.

유월절이 뭡니까?어린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해방된 날이잖아요.

 

예수님은 틈만 나면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드렸어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을 것을 말씀했어요.

내가 죽으면 자기백성들이 죄에서 해방을 받는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이제 예수님이 죽을 그 유월절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마리아는 그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겁니다.

왜? 예수님이 죽습니까?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위하여 죽는 겁니다.

 

마리아는 이걸 안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가 죄에서 건짐 받는다는 것을 안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안 거에요.

 

그래서 자기의 모든 가치와 자기의 모든 영광을 예수님의 죽음에 드린 것입니다.

죄사함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은 그만큼 죄 문제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였다는 뜻이에요.

죄의 심각성을 아니 죄사함을 위한 일에 자기 영광 모두를 예수님의 죽으심에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향유를 부은 사건이 나오는데 거기엔 이름이 없어요.

하지만 이 여인을 흔히들 막달라 마리아가 행하였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이에요.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다가 일어났는데 반하여 요한복음에선 시몬의 집입니다.

누가복음에선 바리새인이 책망을 하였는데 요한복음에선 가룟 유다가 합니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누가복음에서도 시몬의 집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시몬에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는데 저 여자는 향유로 발을 씻긴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시몬의 집이 맞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이 향유 사건을 가지고 탕감 받은 종의 비유로 시몬에게 물어요.

너는 탕감 받은 것이 적으니 내가 와도 발 씻을 물도 안 주지만 저 여자는 탕감 받은 것이 많으니 향유로 나의 발을 씻긴다고 했어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저 여인은 많이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얼마나 죄사함 받은 것이 기뻤으면 향유를 붓겠느냐고 칭찬하셨어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마리아는 나사로의 동생이에요.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기별을 해서 병든 오빠를 고쳐달라고 한 것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과 구면(舊面)이란 말이 됩니다.

 

예수님과 뭔가 만난 사건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선뜻 예수님에게 심방을 요청하지요.

아마도 어떤 큰 은혜를 받은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 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가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막달라 마리아라고도 볼 수가 있어요.

누가복음에서 탕감 받은 종의 비유에서 많이 죄사함을 받은 여인으로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전 향유 사건은 한 사건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그 연장선에서 오늘 본문을 볼 때 마리아는 은혜 받은 것이 많아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미를 알기 때문에 자기 모든 것을 예수님의 죽으심에 쏟아 부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고귀한 향유를 붓고 여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이라고 자랑하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의 은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에 자기 모든 영광과 재물을 드린 겁니다.

 

야~하!

탄성이 절로 나오네요.

오~ 주여!

어찌 이런 은혜가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사랑을 허락하셨나이까!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모르면 신앙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이 거룩함을 입는다는 것이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안다는 것은 자기가 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지 않는 신앙은 전부 가짜에요.

 

마리아와 가룟 유다의 차이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에요.

자기가 죄에서 구속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아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대접을 하였어요.

그러니 자신의 모든 것이 아깝지가 않고 자신의 모든 영광을 예수님 발아래 다 묻어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신앙의 근본을 삼은 겁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선생으로 대접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에게 드려지는 것을 물질적 가치로 판단하여 허비한다고 아까워 한 겁니다.

육적으로 보니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겁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구분이 되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미를 아는 성도는 자기의 모든 것을 올인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아까워하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이 이해되세요.

 

이처럼 영과 육은 신앙생활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서로의 신앙관에 따라서 극명하게 다르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야 넌 어쩜 내 죽음에 내 인생의 가치를 전부를 주느냐! 라고 칭찬하고 있어요.

하지만 가룟 유다는 마리아야 넌 어떻게 이 비싼 향유를 발 씻는데 허비하느냐! 라고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를 책망하는 그 책망 속엔 예수님에 대한 탄핵도 담겨져 있어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이런 처사가 못 마땅했어요.

왜? 못 마땅합니까?

이는 세상 가치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마리아가 하지 못할 짖을 한 겁니다.

세상 가치로 보면 가룟 유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요.

예수님이 잘못했어요.

마리아야 예수님이 좋아서 정신이 나가서 그렇다고 쳐도 예수님은 말렸어야지요.

 

예수님이 선생이라고 한다면 말렸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보느냐!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그냥 있느냐고 핀잔을 주는 겁니다.

 

저 같아도 당연히 말렸을 겁니다.

누가 저를 대접을 한다고 하면서 2100만 원짜리 식사에 초대 한다면 당연히 거부 할 겁니다.

이건 대접이라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보편적인 가치로 볼 때 상식이 아니거든요.

한 끼 식사로서는 너무 많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식사도 아닌 발 씻는데 2100만원을 아무 꺼리낌도 없이 받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받는 사람이 대접으로 보느냐 허비로 보느냐 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허비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대접으로 받았어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대접 하였어요.

예수님도 대접으로 받았어요.

그러나 가룟 유다는 허비로 본 겁니다.

 

왜? 이렇게 다릅니까?

이는 영과 육의 차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는 영적인 안목으로 일을 보았고!

가룟 유다는 육적인 안목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가룟 유다는 허비하는 것으로 보고 화를 내었고,

예수님은 자신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고 기뻐하신 겁니다.

 

이처럼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의 사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눈에는 영적인 일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미련하게 보여요.

예수님의 행동은 세상적 가치관인 윤리, 도덕적으로 보면 지탄받을 수 있는 모습이에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돈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마리아가 돈을 발 씻는데 버린다는 것은 돈의 가치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님에게 깨트린 것은 예수님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유를 하실 때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를 했지요.

어떤 사람이 보화가 감추인 밭을 발견하고는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마리아는 예수라는 보화를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자기 모든 것을 팔아서 산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분임을 안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보화가 숨겨진 예수님이라는 밭을 산 것입니다.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보고 예수님이야 말로 감추어진 보화임을 안 것입니다.

 

이런 보화라면 자신은 발을 닦아 주는 종이 되어도 좋다는 겁니다.

발을 닦아 준다는 것은 종들이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닦어 주는 것은 나는 종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마리아가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것은 자신은 예수님 앞에 걸레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한 거예요.

인간의 영광이란 고작하여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걸레에요.

 

바울은 세상의 자랑거리를 배설물이라고 하였어요.

그러니 걸레 같은 인간의 자랑거리를 들고 나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세상에 영광은 똥이란 걸 알았어요.

 

빌 3:4-1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세상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선 모두가 배설물이에요.

바울은 인간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이 예수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하였어요.

얼마나 해가 되느냐 하면 배설물과 같이 무가치하다고 했어요.

 

바울은 인간이 자랑하는 가문이고, 학벌이고, 권세가 하나님께 거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이런 것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사기에요.

흔히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데 이건 사기에요.

 

그건 자기 탐욕을 자식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이에요.

고 3만 되면 교회 안 와요.

아니 중학생만 되어도 시험 때가 되면 주일에 학원에 간다고 교회에 안 오잖아요.

부모들이 학원가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걸 그대로 되돌려주기를 합니다.

그렇게 키운 자식 때문에 마음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들어요.

일평생 자식만 바라보는 종이 되고 말아요.

 

여러분 등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진실임을 아세요.

잘난 자식은 부모님 속을 썩여요.

자기 똑똑함으로 자기주장을 해요.

그러나 조금 덜난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를 해요.

 

전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부모에겐 옳고 그름으로 따지지 말라고 합니다.

부모는 생명으로 대하는 것이지 법으로 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법으로 키우지 않고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이에요.

부모는 자식을 법으로 잘잘못을 따져 가면서 키우지 않아요.

그러므로 부모를 옳고 그름으로 대할 수가 없는 겁니다.

 

꼭 똑똑한 놈들이 옳고 그름으로 대하려고 해요.

그래서 전 자식 똑똑한 것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자식 때문에 가슴을 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어요.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 속에 일어나는 만고불변의 진리에요.

부모들이 다 잘난 자식들 때문에 가슴 졸이고 살아요.

 

돈 몇 푼 준다고 효도가 아니잖아요.

효도란 부모님 마음을 헤아리는 겁니다.

잘난 놈은 부모님 마음을 헤아림이 없어요.

그저 출세해서 돈 같다 주면 효도인줄 안다구요.

 

그래서 전 이이들 교회 오지 않고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을 보면 속으로 그럽니다.

그 아이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가 아무리 좋은 대학을 간들 그게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어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올시다.

사기 치지 마세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그건 똥이라고!

똥 한 사발을 들고 하나님께 나와서 받으라고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 같으면 똥 한 사발 들고 온 아이를 칭찬하겠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우리는 버젓이 그 짓을 하고 있어요.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돈 많이 벌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좋은 대학 들어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세상에서 출세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눈만 뜨면 가르치잖아요.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에 소원을 들어주시려고 오시지 않았어요.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부 출세시켜 주셨을 겁니다.

그러나 12 제자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세상 적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없어요.

 

세상의 역사엔 베드로란 이름이 없어요.

베드로나 바울이나 스데반은 교회에서나 유명한 사람이지 세상엔 그 사람이 누군데 라고 해요.

세상은 나폴레옹이나 징키스칸을 닮으라고 하지 바울을 닮으라고 말하지 않아요.

 

세상 역사엔 알렉산더 대왕이 영광이 될 수는 있지만 성경을 펴면 예수님과 같이 복음으로 인하여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은 것을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 세상에서 출세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말은 모두가 마귀 소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보세요.

우리가 그렇게 오매불망 원하는 것들은 전부가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잖아요.

우린 눈만 뜨면 하나님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것은 아버지가 준 것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마귀가 준 것이라고 하잖아요.

 

인간은 육신에 소욕을 이루면 이룰수록 육신에 갇히게 되어 있어요.

돈이 많을수록 돈의 노예가 되고,

명예와 권력이 높아질수록 명예와 권력에 종이 되어요.

 

세상 것은 소금물과 같아요.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을 유발시켜요.

결국 그 물 때문에 죽는 겁니다.

 

가난 한 사람은 자살하지 않지만 부자로 살다 망하면 자살해요.

범부로 사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지만 성공하였다 망하는 자는 자살을 해요.

돈 맛을 아는 자들이 돈 없으면 자살을 해요.

돈 없는 세상은 지옥이니까 자살하여서 지옥에 가는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 의지하던 것이 사라지면 죽는 줄 알고 절망하고 비관하게 되어 있어요.

목사도 교인들 의지 하면 교인들 떠나면 의욕을 상실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을 주시면 복음에 방해 되는 것들을 버리는 일들도 병행해서 하세요.

아브라함을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도 본토 친척 아비가 의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에요.

 

성도가 의지할 것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의지의 대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부지런히 자기 백성들이 의지할 것들을 치우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의지할 것들이 사라지면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있다고 믿으세요.

 

자식이 속을 썩이고 말을 안 들으면!

아~ 내가 자식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 새끼를 어긋나게 하는구나 생각하세요.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의지하지 마세요.

의지하는 순간 여러분은 그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의지할 것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므로 항상 인간에게 세상에 보이는 것으로 가두고자 합니다.

주소지를 땅에 두고자 해요.

흙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구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하여 돈을 버렸는데 가룟 유다는 돈을 의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행동이 허비하는 것으로 보인 겁니다.

아이구~ 아까워라!

저 아까운 것을 허비하다니!

 

이처럼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는 가치 판단이 달라요.

육에 속한 자는 세상 가치로 판단해요.

세상 가치란? 돈이에요.

 

있음이 곧 힘이에요.

그러니 무슨 일을 하여도 능률이나 실적을 따지게 되는 겁니다.

철저한 경제 논리로 효율성을 따집니다.

 

가룟 유다는 육에 속한 자였기에 현실적인 가치로 모든 것을 판단하였어요.

그러니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더 효과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면 예수님의 고귀함을 세상에 더 잘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고 여긴 것입니다.

육의 가치로 보면 가룟 유다의 말이 맞아요.

누가 보아도 2100만원이나 하는 향유를 발 씻는데 쓰겠어요.

그건 제 정신이 아니지요.

 

가룟 유다가 보기엔 예수님이 지금 제 정신이 아니에요.

그러니 싸잡아서 비판하는 겁니다.

마리아를 욕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욕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죄사함 받는 것을 물질적 가치 우위에 두었어요.

돈보다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재물의 넉넉함이 죽음을 막아 주지 못한다고!

아무리 많은 재물을 창고에 쌓아 두어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 재물이 과연 생명을 지켜주겠느냐 따져 보라고 하잖아요.

 

마리아는 지금 이 사실을 안 겁니다.

그래 죽어 지옥에 간다면 이 향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문둥병처럼 죄로 썩어가는 몸뚱이에 향유를 뿌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사함 받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겁니다.

재물도 바치고!

자기 영광도 바쳤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입을 맞추고 머리털로 씻겨 드린 겁니다.

인간의 가치는 예수님의 발가락 사이의 때만도 못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선 돈 많은 재벌들이 대접을 받아요.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고 부러움을 사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선 무가치해요.

 

그래서 가룟 유다의 생각은 도적이라고 합니다.

 

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의 속셈은 구제를 핑계로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한 것이라고 합니다.

도적이라 함은 훔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하여 득을 보고자 하는 속셈을 말해요.

 

지금도 가룟 유다와 같은 육적 신자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세상에서 득을 보고자 합니다.

이 시대 교회들은 주의 이름으로 구제를 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교회를 드러내고자 해요.

 

이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가룟 유다의 모습은 육적 신자들의 모습이에요.

지금도 육에 속한 교회들은 착한 일로 교회의 가치성을 세상에 알리고자 해요.

고아원에 쌀 사다주고!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이 신앙인줄 알아요.

 

지진나면 성금 내야지요.

홍수나면 성금내야지요.

세상에 눈 도장 찍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헌금 내라고 하잖아요.

 

지난번에 서울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한다는 사랑의 교회가 수천억을 들여서 교회를 짓는다고 비판을 하니 당회장이라는 목사가 하는 말이 건축헌금의 십일조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해요.

장학금으로 내어 놓겠대요.

이게 예수님 제자 훈련을 하는 교회의 실상이에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강도에요.

도적이란 말입니다.

교인들에게 헌금을 갈취해서 자기 생색을 내고 있잖아요.

아니 왜? 교인들 돈을 훔쳐서 사회에 환원합니까?

이건 강도들이 강도질 한 돈을 고아원에 성금 내는 것과 같아요.

 

성금은 쥐꼬리만큼 하면서 헌금은 엄청 뜯어내잖아요.

그래서 도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핑계로 교인들 주머니를 강탈하는 것이니 도적이라고 하지요.

 

돈을 강탈하는 인간이나!

돈 바치라고 한다고 해서 내는 인간이나 똑 같아요.

예수 안 믿기는 매 일반이에요.

 

이를 두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해요.

소경이 소경을 앞잡이로 세웠으니 얼마나 웃깁니까!

말해 뭣하겠어요.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요.

지옥으로 둘 손잡고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지요.

 

성전 건축을 한다고 하면 교인들이 왜? 뭉텅이 돈을 냅니까?

이는 성전 건축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 내는 거예요.

그러니 돈을 내는 인간도 도적놈인 겁니다.

 

암튼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것과 같이 세상 가치로 신앙을 운운하는 것은 전부 사기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세상의 가치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자고 하는 것은 예수 안 믿는 자들이에요.

속지 마세요.

 

여러분이 눈을 떠야 소경을 목사로 세우지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런 놈들을 따라가지 않을 거 아니에요.

거짓 목사들에게 사기 당하지 않을 것 아니에요.

좌우지간 한국교회엔 거짓 목사들이 뱀의 굴처럼 우굴거려요.

 

그러니 목사들이 성전 건축한다고 돈 내라고 하면 내지 마세요.

이재민을 돕고 수재민을 돕자고 돈 내라고 하면 내지 마세요.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보고 측은지심이 발동해서 돕고 싶으면 개인이 도우세요.

제발 교회에다간 헌금하지 마세요.

 

목사들이 하라고 하는 것을 반대로 하세요.

돈 내라고 하면 돈 내지 말고!

성화하라고 하면 성화하지 말고!

선교하라고 하면 선교하지 마세요.

 

교회는 돈이 없어야 평안해요.

돈은 일만 악의 뿌리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겐 돈을 주지 않고 복음을 주어요.

 

여러분이 부자 안 된 것을 감사하세요.

부자 되었으면 돈을 믿고 있지 복음 안 믿어요.

등 따습고 배부른데 예수 그 딴거 뭣하러 믿겠어요.

예수 없어도 행복한데!

 

돈 있으면 사돈에 팔촌까지 찾아 와서 귀찮게 해요.

열 번 도와주다가 한 번 안도와 줘 보세요.

쌩 욕을 하면서 적개심을 품고 해코지 하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해코지는 가까운 사람이 하지 남이 하지 않아요.

도움을 받은 사람이 해요.

돈 있으면 개떼들 같이 서로 뜯어 먹겠다고 달려들어서 으르렁 거려요.

 

그래서 마귀가 사랑하는 교회는 돈을 주어요.

서로 물고 뜯게 만들었어요.

돈 때문에 망하게 만들어요.

 

돈이 있어 보세요.

그 돈을 쓸 궁리를 하지요.

해외 선교한다는 핑계로 관광 가는 겁니다.

 

아니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복음 전하지 못하면서 우째 말도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선교한다고 합니까?

그건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돈으로 위세를 떨고 돈 지랄하러 가는 거예요.

오죽 했으면 중국에선 한국 선교사들 보내지 말라고 하겠어요.

돈 가지고 사람을 우습게 여긴다는 겁니다.

 

교회의 가치성은 세상을 돕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죄악을 고발하는 것이에요.

세상은 교회를 통하여서 죄가 고발당하여야 하는데 지금은 도리어 세상이 교회를 욕하고 있어요.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다워졌어요.

 

교회와 세상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교회는 하늘에 속하였어요.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없는 하늘에 것을 주어야 해요.

교인들은 세상에서 듣지 못하는 말을 교회에 와서 들어야 해요.

 

세상은 죄에 대하여 말하지 않아요.

의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아요.

심판에 대하여 몰라요.

 

죄에 대하여는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서는 교회에서만 들려져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에서 죄 이야기가 사라졌어요.

의 이야기가 사라졌어요.

심판 이야기가 실종되었어요.

전부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려져요.

전부 땅 이야기만 들려져요.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줄게 없어요.

교회나 세상이나 같아요,

마치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진펄과 개펄과 같아요.

진펄과 개펄은 사해 바다 웅덩이를 말하는데 비가 와서 범람하면 짠물과 민물이 합쳐서 웅덩이에 고였다가 소금 땅에 되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두 물이 만나는 장소를 말하는 겁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샘물이 솟아나서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만물을 소성시킵니다.

그런데 개펄과 진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된다고 했어요.

 

지금 이 시대 교회가 바로 진펄과 개펄이에요.

세상 물과 하늘에 물이 합쳐서 괴물들을 생산해 내고 있잖아요.

마치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을 섞어 놓은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을 갈라놓는데 목사들이 섞어 놓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가 바로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섞여서 진펄과 개펄이 되었어요.

교인들이 두 물을 먹으니 교인도 아니고 세상 사람도 아닌 이상한 괴물인 겁니다.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닌 괴물이에요.

죄인이든지 아니면 아예 의인이든지 하여야 하는데 절반은 죄인이고 절반은 의인이에요.

이걸 노아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여 생산한 네피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네피림이에요.

아주 영악스러운 괴물이에요.

살아서도 천국 생활을 하고 죽어서도 천당에 가겠다고 하잖아요.

고난은 예수님 혼자 받고 나는 배 두드려가면서 살겠다고 하잖아요.

 

세상에서 연락하고 살겠다고 하잖아요.

목사들이 그렇게 살라고 하잖아요.

교인들은 그런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호산나 호산나 하잖아요.

가히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에요.

 

왜? 가난한 자를 돕겠다고 하는 가룟 유다를 도적이라고 하는지 알겠어요.

복음은 세상과 섞일 수가 없어요.

세상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아요.

 

마치 쓰나미가 이집 저집 고려치 않고 들이 닥치듯이 복음도 가난한 자 부자를 가리지 않고 들이 닥쳐요.

닥쳐서 너도 회개치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해요.

예수 안 믿으면 부자도 지옥가고 가난한 자도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복음 핑계대고 측은지심으로 일하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지금 인간들이 가져야 할 관심은 가난한 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죄 문제에 관심가지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떡을 준다고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죄인들에게는 먹고사는 떡 보다는 죄사함이 우선이에요.

 

성경은 이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 부요치 못하고 일평생 돈만 모으고 산 부자를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죄가 사해지는 것인가 아는 겁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내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마리아와 같은 사고로 세상을 살아 갈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을 겁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심정으로 주의 은혜를 사모할 겁니다.

 

당신은 많아 탕감 받았습니까?

아니면 적게 탕감 받았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허비로 보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인하여 당하는 고난을 축복으로 보입니까?

 

당신은 마리아의 눈을 가졌습니까?

가룟 유다의 눈을 가졌습니까?

어떤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부디 여러분에게도 마리아와 같은 영적인 안목들이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때에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보게 하고 깨닫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난 없어도 예수님 있음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울산목양교회 정낙원 목사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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